주일설교

신앙인의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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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9-11-17 14:3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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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감사
(시편 107:1-9)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해 감사를 표현하는 주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추수감사주일을 바로 지키려면 먼저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무엇인가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추수감사주일을 바로 지킬 수 있습니다.
동양의 성현으로 높임 받고 있는 맹자는 ‘부모가 함께 있고 형제가 무고한 것,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내려다보아도 부끄러운 것이 없는 것, 그리고 천하의 영재들을 모아 교육할 수 있는 것 등 세 가지 감사가 나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또 서양 철학의 아버지로 불려지는 플라톤도 자신에게는 네 가지 감사가 있다고 하면서 ‘그 네 가지 감사는 짐승이 아닌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고, 야만인이 아닌 문명인인 헬라인으로 태어난 것이며,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난 것이고, 위대한 스승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에 태어나 그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추수감사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하나님께 대한 여러분의 감사는 무엇입니까?

오늘 봉독한 말씀은 시편 107편 1절부터 9절까지입니다만 실제 오늘의 설교 본문은 107편 전체입니다. 이 시편 107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가 있던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그립던 고국에 귀환한 다음,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내용의 시로서 문학적 형식은 감사시입니다. 그래서 이 시의 내용을 감사로 나누어 설명해 드린다면, 우선 시인은 과거를 회상하며 많은 민족 중에서 자기 민족을 선민으로 택해주신 하나님께서 이후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자기 민족을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자기 민족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자기 민족을 버리지 않으시고 오늘에 고국에 귀환하게 해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미래에도 자기 민족이 진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면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의 미래를 보장해 주실 것이라고 믿으며 감사합니다.
그런 까닭에 시인은 시의 처음부분인 1절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감사하며 살 것을 권면하고  있는데,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추수감사주일인 오늘 우리도 시인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감사하라고 권면한 이 1절 말씀을 수용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내용을 바로 깨달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바로 깨달아야 할 감사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의 본문인 시편 107편에서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할 감사의 내용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 즉 시간과 관계하여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과거와 관계된 에벤에셀의 은혜입니다.

에벤에셀이란 말의 뜻은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를 도우셨다’입니다. 즉 지난 과거의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셔서 오늘 우리가 존재할 수 있다고 고백하는 것을 신앙의 언어로 에벤에셀이라 한다 그 말입니다.
「타타타」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노래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그 노래가사처럼 산다는 것이 정말 좋은 것임을 알고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자신이 알몸으로 인생을 시작했다는 것을 먼저 아는 데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옷 입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최소한 옷 한 벌은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옷 한 벌만 가지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것들을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까? 사실 이것 하나만 깨달아도 우리는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대답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이렇게 건강하게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그리고 자유가 보장된 남쪽 땅에서 가족과 행복하게 웃으며 살고 있는 것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고 있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신앙의 눈으로 자신을 살펴볼 줄 아는 사람은 오늘 내가 이렇게 호흡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이나, 내가 알몸으로 살지 않는 것이나, 내가 이렇게 신앙인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나,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대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건한 신앙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수학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낱낱이 헤아려 보는 것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분의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는 정말 너무도 많아 셀 수가 없습니다.
본문을 기록한 시인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본문 말씀 4절에서 8절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주셨고, 이후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던 그들의 목마름과 배고픔과 추위와 더위를 해결해 주시며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복케 하셨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우게도 해주셨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거를 돌아보니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고백했던 시인의 고백처럼 여러분의 과거 인생에도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 즉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도록 불러주셨고 감당하기 어려웠던 많은 문제들도 잘 감당할 수 있게 도와주셨던 에벤에셀의 은혜가 있었음을 이 시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셨던 에벤에셀의 은혜, 그 은혜에 대한 감사가 바로 신앙인이 해야 할 감사입니다. 지나온 과거를 돌아보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2. 현재와 관계된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입니다. 즉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포기치 아니하시며 은혜를 베풀고 계신다고 믿는 것을 신앙의 언어로 임마누엘이라 한다 그 말입니다.
멕시코에 한쪽에는 부글부글 끊는 온천물이 펑펑 솟아나오고 그 옆에는 아주 차가운 냉천물이 솟아나오는 마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 여인들은 옷을 빨 때 먼저 온천에 세탁할 옷을 가지고 가서 푹 삶은 다음 냉천에 가서 깨끗하게 헹굽니다.
그렇게 빨래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한 관광객이 가이드에게 말했습니다. “이 마을의 여인들은 저렇게 더운 물과 찬 물을 마음대로 거저 쓸 수 있으니 항상 감사하며 빨래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말에 가이드는 아니라고 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이 곳 여인들은 감사보다 불평을 많이 합니다.” 그 말에 관광객이 무슨 불평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그 질문에 가이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여인들이 불평하는 것은 더운 물과 찬물은 있지만 비누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만 그런데 사실 우리에게도 그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은혜를 하나님께 받고 살았습니까? 그럼에도 어떤 문제만 생기면 너무도 쉽게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불평의 말을 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하나님이 자기를 버렸다고 하면서 신앙을 버리기까지 합니다. 두 말할 필요 없이 그런 생각이나 행동은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대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임마누엘의 은혜를 베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이란 주 안에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주 안에서 사는 사람이란 세상이 빼앗지 못할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무한하신 사랑과 능력으로 늘 도와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모든 문제의 해결자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주 안에서 사는 신앙인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보다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고 능력있게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물론 신앙인에게도 인생의 여러 시련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임마누엘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책임져 주시는 까닭에 그 시련은 절대 시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오늘도 주 안에서 살고 있음을 믿고 사는 신앙인은 오늘의 그 어떤 시련 속에서도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그렇게 찬송하며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오늘의 상황이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에게는 임마누엘의 은혜, 즉 하나님이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계시는 그 은혜가 이미 주어져 있음을 이 시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인은 이 임마누엘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즉 시편 107편 10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 나오는 대로 불신앙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임마누엘의 은혜가 있었기에 오늘에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국에 귀환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임마누엘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은 오늘도 나를 버리지도 않으시고 포기하지도 않으시며 나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신앙으로 오늘의 그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께 그저 감사하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미래와 관계된 여호와 이레의 은혜입니다.

여호와 이레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주신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미리 준비해 놓으셨다고 확신하는 것을 신앙의 언어로 여호와 이레라 한다 그 말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가기를 원했던 청교도들이 처음으로 탔던 메이 플라워라는 배 안에는 엘리자베스 합킨스라는 젊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녀는 항해기간동안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일기를 썼는데, 그 일기 가운데 어느 날의 일기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신대륙을 향해 출항한지 두 달 만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식량이 얼마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약 한 달 반이면 신대륙에 도착할 줄 알고 양식을 그렇게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식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도자는 그래서 우리를 모이게 한 다음 신대륙에 도착하기까지 며칠이 더 걸릴지 모르니 식량을 절약하기 위해 오늘은 모두가 금식하자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우리도 찬성했습니다. 그러자 지도자는 ‘오늘은 금식의 날입니다’ 그렇게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어떤 사람이 그의 말에 이의를 제기 했습니다. ‘금식하자는 데는 동의하지만 금식의 날이라는 표현에는 반대합니다. 금식의 날보다는 감사의 날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의 말에 어떤 사람이 반문했습니다. ‘감사의 날이라니요?’ 그 반문에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감사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난 두 달동안 배를 타고 왔으니 이제 신대륙에 거의 가까이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또 안타깝게도 그 동안 생명을 잃은 분들도 있지만 우리는 지금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있습니다. 그러니 이것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리고 또 우리에게는 신대륙에서 펼쳐나갈 신앙의 미래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실 복의 역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감사의 날로 부르며 금식하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말에 모두가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자리에서 시편 100편을 함께 읽고 주님께 감사하는 찬양을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우리는 이제 곧 신대륙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그 신대륙에서 우리가 곧 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신대륙에 펼쳐지게 될 미래를 바라보며 우리는 지금 금식하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기를 엘리자베스 합킨스가 썼는데, 이 일기를 쓴 날로부터 정확히 닷새 후인 1620년 12월 21일 그들이 탄 배는 현재 프리머스라 불리워지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육신의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놓으신 여호와 이레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열악한 환경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했고, 그 감사를 가지고 오늘의 미국이라는 나라를 시작하여 그 나라를 세계 최강의 나라로 만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여호와 이레의 신앙으로 오늘이 어떠하든지 그 오늘을 넘어 미래에 베풀어 주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의 역사를 확신하면서 먼저 감사해야 합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우리는 과거에 아름답게 이루어졌던 일들과 현재 받고 있는 여러 은혜들에 대해 당연히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게 받은 것에 대해 하는 감사를 후속적 감사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감사는 그런 후속적 감사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즉 그런 감사를 넘어 아직 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미래에 나타나게 될  여호와 이레의 은혜를 기대하면서 먼저 감사해야 한다 그 말입니다. 그렇게 받게 될 은혜를 기대하며 먼저 하는 감사를 선행적 감사라고 합니다.
본문의 시인은 그런 선행적 감사를 했습니다. 분명 그는 미래에 베풀어 주실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은혜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시편 107편 41절과 42절의 말씀에 나오는 대로 여호와 이레의 은혜를 바라보며 감사했습니다. “궁핍한 자는 그의 고통으로부터 건져 주시고 그의 가족을 양 떼 같이 지켜 주시나니 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 모든 사악한 자는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 이런 시인이 했던 선행적 감사를 오늘에 여러분도 여호와 이레의 신앙으로 할 수 있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신앙인이 해야 할 감사는 과거에 베풀어주신 에벤에셀의 은혜에 대한 감사, 즉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여 자녀 삼아 주셨고 내 인생을 도와주셨으며 인도해 주셨다는 것을 고백하며 하는 감사입니다. 그리고 또 현재 베풀고 계시는 임마누엘의 은혜에 대한 감사, 즉 하나님께서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으며 하는 감사입니다. 그리고 또 미래에 베풀어 주실 여호와 이레의 은혜에 대한 감사, 즉 미래에 나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은혜가 있다는 것을 소망 가운데 확신하며 하는 감사입니다.
이런 세 가지 감사를 우리가 하고 산다면 하나님께서는 시편 50편 23절의 말씀에서 약속하신 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십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과거를 돌아보면서도, 그리고 현재의 그 어떤 형편에서도, 그리고 미래를 바라보면서도, 그저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그런 감사가 진정 신앙인이 해야 할 감사입니다. 그런 감사의 신앙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신앙인이 되어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구원의 역사를 보며 인생을 사는 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019. 11. 17.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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